σ Kim Jae 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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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 베이징

평소 중국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중국에 가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유럽에 다녀온 직후였다. 유럽에서 일상적으로 보게되는 건물과 유적들에 대해서 약간은 식상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마다 양치질을 하면서 내려다보는 덕수궁이 새롭게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중국에 다녀와야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끓어 올랐다. 결국 추석 연휴를 이용해서 베이징행 AIR CHINA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출발 당일 아침, 새벽같이 일어나서 여유를 부리며 샤워도 하고 옷도 다리며 룰루랄라~ 출발준비를 했다. 다림질이 거의 끝나갈 무렵, 불현 듯 불길한 예감이 들면서 다시금 비행기 시간을 확인한 결과 비행기 시간은 11시가 아니라 10시였다. 나는 8시까지 공항에 도착해야만 했고 그때는 7시가 훌쩍 넘어선 시간이었다. 대책이 없었다. 다시금 차를 끌고 공항으로 내달 리는 수밖에.. 주차료가 머리속에서 아른거렸다. 머리가 나쁘면 팔다리가 고생한다고 하더니만, 나는 주머니 속의 지갑이 고생하는 꼴이었다. 쩝...

아침 10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북경수도공항에 11시반에 도착했다. 한시간 반이 걸렸고 현지 시간에 시계를 맞추고 나니 시계는 10시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시간 정도의 시차가 나는 셈이다. 인천공항에서부터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다녔다. 그의 이름은 전소현. 사전에 그의 이름을 전해들었을 때만 해도 아리다운 아가씨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꿈★은 깨어질 수도 있다"고 했던가? 아니면 "혹시나.."가 "역시나~" 가 된다고 했던가.. 가이드의 풍모는 부자집 맏며느리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넓고 깊어서 여행객들의 지친 마음을(놀다 지친~) 어루만져줄 수 있는 큰언니이자 큰누님과도 같은 고마운 존재였다.

사실 가이드를 통해 여행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 아닌가 생각된다. 빡빡한 일정도 그렇고 쓸데없는 코스가 끼어드는 것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 베낭여행 다니기가 자신이 없었다. 유럽의 경우에는 교통 사정이 좋아서 시내에서는 지하철이나 전철을 타고다니고 도시간에는 기차로 이동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중국은 그렇지 못하다고 들었다. 특히 만리장성 같은 경우는 현지 일일 가이드 투어를 해야 한다고 했다. 곰곰히 생각한 끝에 여행상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일정도 적당하고 북경에서 중요하다 싶은 곳은 대부분 관광코스에 포함되어 있었다. 짧은 일정동안 이렇게 많은 곳을 둘러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마도 혼자 배낭여행을 떠난다면 하루 이틀은 족히 더 소요될 만한 일정이었다. 결국 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일정에도 없는 곳을 몇군데나 더 둘러보았다. 그것이 여행상품이 갖는 단점이기는 했지만..

공항에서부터 일행은 줄을서서 가이드의 깃발을 따라 이동했다. 우리는 이름부르는 순서대로 이열 종대로 줄을서서 앞사람의 뒤통수를 쳐다보며 걸었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이것은 매우 효율적인 시스템이었다. 가이드는 우리를 단체 전용 입국심사대로 안내했고 입국심사관은 명단에 적힌 순서대로 우리 일행을 확인하고는 통과시켰다. 우리 일행 좌우로는 일반 입국객들이 부러운, 그러나 약간은 불만섞인 시선으로 우리 일행을 쳐다보았다. 개인 자격으로 입국했다면 아마도 30분은 족히 더 걸렸을 것이다.

북경공항의 천장은 인천공항과 비슷한 철골구조를 갖고 있었다. 짐을 찾는 곳에서 잠시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중국은행의 자동 환전기 위로 시트로엥 자동차 광고판이 보였다. 나중에 확인한 사실이지만 북경시내를 굴러다니는 택시중 상당수가 시트로엥이었다. 공항을 나와 대기중인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현지 가이드가 소개되었다. 이미란씨, 자그마한 키에 마른체격, 약간은 신경질적일 것 같은 외모로 인해 별로 호감이 가지는 않는 스타일이었지만 상냥한 목소리로 꼼꼼하게 성의를 다해 안내하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그는 조선족이었고 한 때는 일본 관광객을 대상으로 가이드를 했는데 수입도 현재의 세배 정도 되었지만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앞에서는 샹냥하지만 뒤에서는 칼을 꼽는다고 했다. 그게 싫어서 정이 많은 한국 관광객 가이드를 자원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가 말했다. "오늘은 발광을 하셔야 합니다" 발광은 발로 걷는 관광이라고 했다.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이 모두 한없이 걸어다녀야 하는 코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지랄발광'은 또 무슨 뜻이란 말인가...?

버스는 먼저 전통문화거리인 류리창으로 향했다. 비로소 마음의 여유를 갖고 버스 안에 탄 일행을 둘러보았다. 평균연령이 50은 되어보였다. 불현 듯 수년전 홍도에 갔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서울에서 2박3일 코스는 되어야 다녀올 수 있는 곳, 홍도에 도착하자 주위는 온통 아저씨 아줌마로 가득 했다. 분위기가 참으로 칙칙했다. 급기야 어느 아저씨는 대낮부터 유람선 안에서 술에 취해 노래를 불렀다. "바다가 술이라면~♪ 바다가 술이라면..♩ 외상값은 없었을 텐데..~♬..우우~" 그 칙칙한 분위기가 다시금 떠올랐다.

 

공항을 떠난 버스는 베이징의 최고 전통문화거리인 류리창(琉璃廠)에 도착했다. 750m 길이의 골목길 양쪽에 늘어선 오래된 중국풍의 건물들은 대부분 전통 서화나 고서적,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었다. 그야말로 베이징의 인사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황실 건축에 사용되는 유리 기와 제작소로 사용되면서 지금의 이름이 붙었는데 그 후 문방구, 고서적을 파는 상점이 늘면서 상점가로서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인사동의 경우는 볼거리도 많고 호떡이나 엿 그리고 전통술과 같이 먹을거리도 풍부하여 현대화된 전통거리라고 생각되는 반면 류리창은 개발이 덜 되어서인지 상대적으로 조용한 거리로 느껴졌다. 류리창을 나와 버스까지 10여분 간을 걸었다. 길거리에는 자전거를 타고가는 사람들이 무척 많았고 길가에는 자전거 보관소가 곳곳에 있어 수많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버스에 오르자 곧 천안문 광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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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은 황성의 정문이고 이 앞에 조성된 길이 880m, 넓이 500m의 광장이 천안문광장이다. 50여만명이 모일 수 있는 규모라고 하는데 지도상으로 베이징의 중앙에서 약간 아래에 위치하며 중국의 심장부에 해당한다. 확실히 유럽의 광장과는 개념이 달랐다. 커서 꼭 좋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에게도 과거에 여의도 광장이 있지 않았던가?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되었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여의도광장으로 불리웠고 국군의날이나 대통령선거 유세가 있는 날이면 백만여명의 군중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모여 웅성대선 곳, 규모로 보면 그곳이 천안문 광장보다 두배로 규모가 컸었다.

천안문 광장 중앙에는 인민영웅기념비가 우뚝 서있다. 중국 인민의 해방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유,무명 혁명 영웅들을 기리는 뜻에서 5년간의 제작 기간을 거쳐 195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기념비 남쪽으로 모택동기념관이 있다. 1976년 9월9일 모택동이 사망하자 1주기가 되는 1977년 개관되었다. 기념관 입구 좌측에는 중국 인민들을 형상화한 조각상이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세워져 있다. 기념관에서 천안문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중국혁명박물관이자 중국역사발물관 건물이 있고 왼쪽으로는 인민대회당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다. 인민대회당의 중앙홀은 전국인민대표자회의가 개최되는 곳으로 1만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이다. 규모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속에서 무엇을 하는가일 것이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안에서 밤낮으로 폭로전이나 일삼는 정치꾼들이 선거때만 되면 젊은이들이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난리다. 정말 웃기는 꼬락서니가 아닐 수 없다.

광장 북쪽에 세워져 있는 천안문에는 모택동의 거대한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광장에서 천안문으로 가기 위해서 지하도를 건너가야 했다. 지하도 입구 근처에는 국기게양대가 세워져 있다. 매일 아침 이곳에서는 오성홍기 게양식이 장엄하게 벌어지고 이를 보기 위한 인파가 광장의 절반을 가득 메운다고 한다. 꼭 한번 보고싶은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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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모택동의 거대한 초상화 아래 가운데 문을 통해 즈진쳥(紫禁城)에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자금성을 꾸꿍(故宮)이라 부르는데 명청 시대의 24명의 황제가 살았던 황궁이다. 천안문을 지나 꾸꿍의 정문인 우먼(牛門)이 버티고 섰다. 높이 9m의 성벽도 위압적이지만 성벽 주위로 통즈허라는 물이 꾸꿍을 둘러싸고 있다. 우먼을 들어서자 진쉐이허(金水河)라는 인공 수로가 곡선을 이루며 흐르고 그 너머로 타이허먼(太和門)이 보였다. 나무가 하나도 없는 것이 특이한데 자객의 접근을 방지하고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한다.

타이허먼을 지나자 황제가 정무나 의식을 행한 장소로서 권력의 상징이자 중국 최대의 목조 건물인 타이허뎬(太和殿)이 나타났다. 타이허뎬 앞 광장은 황제의 즉위식이나 혼례가 집행되었다고 한다. 타이허뎬 주변에는 거대한 방수용 항아리들이 놓여있는데 일부 금도금을한 항아리들은 1900년 영불 연합군의 베이징 침입시 약탈당하여 금칠이 보기 흉하게 벗겨져 있었다. 특이한 것은 전각 지붕이 모두 금색 혹은 노란색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황제의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색으로 금색을 사용했다고 한다. 몇 년 전 이곳 도색을 새로이 하면서 한국의 업체가 작업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타이허뎬을 지나자 황제의 대기실 역할을 한 쭝허뎬(中和殿)과 공신들의 연회가 치러지거나 과거가 시행된 바오허뎬(保和殿)이 연이어 나타났다. 바오허뎬 뒤편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용의 모습을 형상화한 거대한 대리석 조각이 만들어져 있다. 이 조각에 사용된 무게 250톤의 거대한 대리석을 옮기기 위해 50km 밖에서부터 겨울에 길가에 도랑을 파고 물을 부어 얼린 후 1만여명의 인부와 1천마리의 말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결혼은 미친짓이다' 라는 영화가 있었지만 참으로 황제의 권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을 많이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대전(三大殿)이 있는 곳을 외조(外朝)라 부르고 외조를 지나면 황제가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하거나 황실 가족들이 기거하던 주거공간인 내정(內廷)이 나타난다. 이 곳은 동서 6궁(東西 6宮)과 황실 정원인 위화위엔(御花園)으로 이루어져 있다. 위화위엔은 오래된 나무들과 전각이 흩어져 있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이다. 정원 한 구석에는 기묘한 바위들을 쌓아 올린 인공산인 뚜이시우산이 있는데 산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돌무더기에 가깝고 꼭대기에는 정자가 세워져 있어 이곳에서 올라가 달을 감상하거나 궁중여인들이 궐밖 세상을 내다보며 위안을 삼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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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위엔을 지나 꾸꿍의 북문인 션우먼(神武門)을 나오면 길건너편에 황실 전용 공원이었다는 징샨공원 (景山公園)이 나타난다. 원래 베이징은 평지라서 풍수지리학적으로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꾸꿍 북쪽으로 인공산을 쌓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징샨공원을 이루는 해발 108m의 나지막한 산이라고 한다. 산 정상에 오르면 베이징 시내가 사방으로 한눈에 내려보이고 꾸꿍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을 내려와 공원길을 따라 남문쪽으로 가다보면 왼쪽 숲에 홰나무 한그루가 서있는데 바로 이곳이 명나라 최후의 황제가 망국을 비관하며 목을 매고 자살한 곳이다. 문화혁명 때 잘려나갔으나 그 후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같은 위치에 다시 심었다고 한다.

징샨공원을 나올 즈음 가이드 말대로 발광(발로 걷는 관광)으로 지친 일행을 태운 버스는 소림사 무예공연을 하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퇴근무렵이라 도로는 무척 혼잡했고 버스는 더디게 달렸다. 공연은 한마디로 '아햏~' 였다. 늦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중국 식당에 들어갔다. 서빙하는 직원들은 한국말을 전혀 할줄 몰랐다. 식사 도중 테이블에 앉은 일행 한사람이 서빙하는 아가씨를 불렀다. "저기요..(손가락으로 밥을 가리키며..) 밥좀 더주세요~"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내가 말했다. "이번엔 제가 한번 해보지요.." 식탁위의 일행들이 모두 나를 주목했다. "샤오지에~ ", (네프킨을 가리키며..) "이거 좀 더주세여~" 놀랍게도 종업원이 내말을 알아듣고 네프킨을 가져다 주었다. 다시금 깨달음이 왔다. '여행중에 외국어 못해도 돈쓰는 사람은 아쉬울 거 하나 없다. 답답한건 상대방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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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버스는 이화원으로 향했다. 이화원은 초대형 황실 별궁으로 드넓은 호수 쿤밍후와 완셔우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제 자금성 옆의 경산공원에 갔을 때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런데 서울 잠실의 호수공원보다 커보이는 이화원의 호수를 그 옛날 장비도 변변치 않던 시절, 오직 사람들의 힘으로 15년간 파고 또 파서 호수를 만들고 그 파낸 흙을 옆에 쌓아 산을 만든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원래는 금나라때 처음 만들어지고 1750년 경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벌였지만 제2차 아편정쟁 때 영불연합군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훗날 청나라의 실권을 좌지우지하던 서태후가 해군함선 건조를 위해 조성한 3,00만냥의 거금을 유용하여 10여년에 걸쳐 재건하였다고 한다.

이화원은 황제가 정무를 보던 근정지구와 황실 가족이 머물던 거주지구, 자연경관을 즐기던 유람지구로 이루어져 있다. 규모가 커서 제대로 관람하려면 하루종일 걸려도 모자를 것 같았고 나는 단지 호수가 주변을 배회가는데 그쳤다. 호수가에는 이화원의 대표적인 볼거리인 창랑(長廊)이 700여m에 걸쳐 세워져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오랜 다리라는 루쩨른의 카펠교도 다리를 덮고 있는 지붕 실내 천장에 역사적인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창랑의 길고긴 회랑 천장도 풍경이나 고전문학, 민간전설을 상징하는 화려한 그림으로 가득차 있었다. 모두 14,000여점이나 된다고 한다.

창랑이 끝나는 지점에서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 근처에는 전체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배라고 해야할지 수상 건축물이라고 해야할지 모를 스팡(石舫)이 보였다. 이화원 중건 당시 건륭제가 청나라 황실이 반석위에 서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영원히 침몰하지 않을 배 스팡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철판으로 배를 만들었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배 전체를 돌로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독특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유람선은 호수를 가로질러 이화원의 입구에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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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단공원은 황제가 매년 하늘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제를 올리는 매우 신성시되던 곳이다. 규모가 어제 보았던 자금성의 3배에 달하므로 또다시 발광(발로걷는 관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날씨는 맑고 화창하여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였다.

남쪽 입구로 들어서자 황제가 제천 행사를 거행하던 곳 환치우탄이 나타났다. 대리석으로 만든 원형의 제단이 3층으로 만들어져 있고 중앙에는 천심석이라는 작은 대리석이 놓여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 대리석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이곳에 서서 노래를 하면 강한 공명이 느껴진다는 말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환치우탄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황치옹위이다. 제사 전날 황제가 이곳에서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푸른 지붕이 원추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내부 천장에는 원형의 문양들이 화려하게 채색되어있어 중국 건축 예술의 최고 걸작품으로 불리운다. 황치옹위를 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벽은 회음벽이란 이름이 붙어있다. 이 벽 한쪽 끝에서 벽에 대고 속삭이면 반대쪽 벽에서도 들린다고 한다.

황치옹위를 지나 북쪽으로 가면 긴 대리석 길을 지나 치녠뎬에 이르게 된다. 3단의 대리석 기단 위에 앞서 보았던 환치우탄과 유사한 푸른 지붕이 3중으로 이루어진 건물로서 제천행사가 진행되면 황제는 이곳에서 무릎을 끓고 제를 올렸다고 한다.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표를 3번을 사야 했다. 이유인 즉 중국인들도 아침마다 운동삼아 이곳 천단공원을 자주 찾는데 그들은 대부분 입구 안쪽까지만 들어오고 관광객들은 치녠뎬까지 들어오기 때문에 요금을 차등화했다는 설명이다.

천단공원의 건물들은 모양부터가 앞서 보았던 어떤 궁과도 다른 독특함을 풍기고 있었다. 원추형의 모양도 그렇거니와 자금성과 같이 황제가 거처하는 곳들이 모두 황금색으로 지붕이 채색된데 반해 이곳 천단공원 건물의 지붕은 파란색을 띄고 있었다. 이는 천단공원이 천신과 만나는 곳이므로 황제라 하더라도 겸손한 자세를 갖는다는 의미라고 한다.

천단공원의 종착역인 치녠덴에서 급기야 나는 일행을 놓치고 미아신세가 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시 어느 쪽으로 일행을 찾아볼까 생각한 후에 들어온 방향으로 내달렸다. 치녠뎬을 나와 긴 대리석길을 다시 달려 황치옹위까지 내달렸다. 그러나 일행은 없었다. 황치옹위에서 좀더 들어온 길로 가려고 하자 검표원이 표를 사야 한다고 막았다. 나는 다시 미아가된 위치로 돌아왔다. 가이드의 화난 얼굴과 일행의 짜증난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가이드가 알려준 대로 주변에서 다른 가이드를 찾았다. 한국 가이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용기를 내어 중국인 남자 가이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친구를 잃었는데 전화좀 쓰자고 했다.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전화기를 꺼내어 내가 펴보이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마구 지껄여댔다. 아마도 이런 말이었을 것이다.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손님을 흘리고 다니면 어쩌자는 거야~"  아무튼 그런 와중에 다시금 일행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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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화궁은 베이징 최대의 라마교 사원이다. 원래는 청나라 3대 황제인 옹정의 사저로서 황궁의 일원이었으나 그가 죽자 시신이 3일 정도 머문 탓에 전(殿)으로 승격되면서 기존의 청색기와가 모두 황색 기와로 교체되었고 비로소 황궁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그들이 지배하는 소수 민족의 종교를 모두 포용하는 화합정책을 표방했는데 이의 일환으로 1744년 옹화궁이 정식 라마교 사원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한다.

옹화궁의 마지막 정전인 완푸거에는 높이 26m의 거대한 나무 불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세계 최대의 목조 불상이라고 한다. 사원 곳곳에서는 한움쿰씩 향을 피우며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북경에 도착한 둘째날 저녁, 나와 일단의 무리들은 베이징에서 밤의 명소로 불리운다는 싼리툰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북경공인체육장 앞의 하바나 카페였다. 1500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공간에서 자유로운 기분으로 라틴 음악을 즐길 수 있다는 광고문구가 우리를 자극했다. 택시 두 대에 나눠타고 출발했다. 목적지 앞에서 택시기사는 아무렇지도않게 중앙선을 넘어가는 유턴을 감행했다. 덕분에 조수석에 앉은 나는 반대편에서 돌진하는 자동차들에 놀라 기겁을 해야했다. 그러나 도로위의 누구도 대수롭게 생각지 않는 분위기였다.

어렵사리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먼저 떠난 일행은 도착하지 않았다. 기다리던 끝에 포기하고 하바나 카페로 들어갔다. 1500명은 고사하고 50명도 앉기 어려운 작은 카페였다. 야외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맥주를 한병씩 시켜 마셨다. 카페 옆의 체육장은 놀이시설이 들어서 있었고 나름대로 조명이 장식되어 있었으나 촌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베이징은 촌스러운 곳이군... 그런데 이런 생각이 다음날 여지없이 깨어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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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의 셋째날 아침, 일행을 태운 버스는 명13릉으로 향했다. 명13릉은 명나라 황제 13명의 묘지가 모여있는 황실 전용 묘역으로 톈셔우산(天壽山)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총 면적이 40㎢에 이르며 과거 이곳을 지키는 위병만도 몇 만을 헤아렸다고 하니 능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13릉 중 명나라의 3번째 황제로 나라의 기틀을 확립한 영락제의 묘지인 쟝링(長陵)을 찾았다. 입구에 들어서자 쟝링의 주전인 링은뎬이 웅장한 모습으로 눈앞에 들어왔다. 역시 지붕은 황제를 상징하는 금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링은뎬 안에는 황제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나 인상적인 것은 옥대라고 했던가.. 황제가 사용하던 허리띠가 무척이나 컸는데 아마도 영락제는 비만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갖게 했다. 물론 얼마 전에 유행했듯이 허리띠 한쪽을 땅바닥에 길 게 늘어뜨리며 다녔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쟝링은 좀 허탈하다고나 할까.. 그나마 나오는 길에 모택동이 쉬어갔다며 사진이 걸려있는 곳에서 사진 한 장을 찍은 것과 나와 함께 북경의 밤거리를 휘젓고 다닌 멤버들과 더불어 기념사진 찍은 것이 위안이 되었다.

(위 사진에 서있는 인물은 나를 영감이라 부르며 놀려댔던 권연, 나는 그를 할멈~ 이라 불렀다. 벤치 오른쪽이 나와 같은 방을 썼던 유지영, 이름만 보고 놀라지 말라. 남자다~ 만리장성 케이블카 입구에서 오랜시간 실랑이 끝에 깎구 깎아서 산 덜모자를 쓰면 영락없는 만주벌판의 마적단 두목임에 틀림 없어 보인다. 가운데가 정상원, 그는 멤버들 중 나 다음으로 고령자인데 DHL 부산사무소에서 가장 유능한 인물이다. 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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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오히려 감동이 적었던 곳이 바로 만리장성이다. 실제 길이는 12,700리에 이르며 베이징에서 서북쪽으로 약 70km 거리에 위치한 빠다링창쳥 (八達嶺長城)이 베이징 인근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장성이다. 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빵차로 불리우는 미니밴을 타고 장성을 오르는 케이블카 아래까지 갔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했다 한다. "장성에 올라보지 않고 사나이라 칭하지 말라" 물론 걸어서 오르라는 말일 것이다. 우리 일행은 케이블카를 타고 10여분 만에 만리장성에 올랐다. 끝없이 이어진 장성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높은 곳에 오르자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쓰고 있던 모자가 바람에 날라갔다. 나는 모자를 잡으려고 팔을 뻗다가 중심을 잃고 비탈길에서 넘어졌다. 한마디로 오징어가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카메라를 든 손은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덕분에 카메라는 멀정했다. 그러나 몸은 욱신거렸다.

춘추전국시대에 각 나라가 자국의 방어를 위해 쌓기 시작한 것을 진시황제가 연결하여 완성하였다는 만리장성이다. 특히 빠다링창쳥은 험준한 산세에 세워짐으로써 베이징을 지키는 철통같은 방어망이었으나 명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이자성의 반란군이 빠다링창쳥을 넘어 베이징에 입성함으로써 치명타를 입히기도 했다고 한다.

만리장성을 내려온 일행중 몇몇은 모자를 파는 길거리 가게에서 주인과 줄다리기를 한 끝에 털모자를 샀다. 버스 맨 뒤자리에 한줄로 앉아 털모자를 뒤집어쓰자 그옛날 만주벌판을 누볐다는 마적단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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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행코스의 마지막은 소계림으로 불리운다는 용경협이었다. 계림을 가보지 못했으니 소계림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나 댐이 건설되면서 만들어진 협곡 사이를 배를 타고 지나가며 감사하는 기분도 꽤 괜찮았다.

버스로 용경협 입구에 내려 조금 걸어가자 거대한 댐이 나타났다. 댐 오른쪽에 있는 용 모양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댐 위로 올라갔다. 유람선을 타고 총 7km에 이르는 협곡 사이를 누비며 웅장한 봉우리들이 늘어선 아름다운 경치를 즐겼다. 중간 부근에서는 번지점프장도 있었고 그 옆에서는 협곡 사이에 연결해놓은 줄 위로 자전거를 타는 묘기를 구경할 수 있었다. 베이징 여행 코스중 유일하게 자연을 감상하는 코스였기에 신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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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서의 마지막 밤, 전날 싼리툰에 나갔다가 실패한 경험을 거울삼아 하루종일 틈틈이 여행안내서를 탐독하며 준비한 곳이 천안문 광장 우측에 위치한 베이징 최고의 번화가로 불리우는 왕푸징 거리였다.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왕푸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에서는 버스 타기도 마땅치 않고 택시 요금도 비교적 저렴하여 시내 이동시에는 택시를 주로 이용했다.

택시가 지하철 노선 부근을 따라 달릴 무렵 나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거리의 풍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제 보았던 싼리툰의 허접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베이징의 광화문 거리로 생각되는 큰길 좌우로 초현대식의 거대한 건물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길은 오랫동안 길 게 이어지고 있었다. 순간 나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왼쪽으로는 휘황찬란한 불빛에 빛나는 북경역이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택시는 왕푸징 거리 입구에 섰다.

왕푸징은 베이징의 명동과도 같은 상점가가 밀집된 거리이다. 입구에서 얼마간 걸어 들어가자 오른쪽으로 맥도널드 상점 앞에 코끼리 버스와 비슷한 관광 순환버스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거리 골목을 누비며 달리기를 40여분, 출발지점에 돌아오자 나와 우리 일행은 택시를 타고 베이징역으로 갔다. 아까 스쳐지나간 베이징 역의 야경이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북경역에 도착하여 사진을 찍고는 지하철 역까지 걸었다. 베이징의 지하철은 순환선과 직선노선 2개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순환선과 직선노선이 만나는 환승역인 젠쿼먼(建國門)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2정거를 지나 왕푸징 역에서 내렸다. 베이징의 지하철은 우리나라 서울의 지하철 1호선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순환선은 70년대에 만들어졌다고 하고 젠쿼먼에서 왕푸징, 텐안먼(天安門)을 연결하는 직선 노선은 2000년 10월에 개통되어 비교적 깨끗했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왕푸징으로 돌아온 우리는 신동안시장 앞에 있는 야시장에 들렀다. 온갖 다양한 꼬치구이와 기념품을 파는 골목이 길 게 늘어서 있었다. 물건을 놓고 흥정을 벌이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눈에 띄었고 상점 주인도 흥정을 즐기는 듯 했다. 왕푸징 거리에는 오래된 백화점이나 고급 브랜드로 가득찬 고급 백화점 그리고 전통 요리집과 패스트푸트점이 공존하는 활기에 찬 거리였다. 유흥가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9시가 넘어서자 하나둘 불이 꺼지고 사람들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이 특이했다.

왕푸징 천주당은 조명을 받아 아름다웠는데 천주당 앞 광장에 자리잡은 거리의 악사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왕푸징 거리 끝부분에서 지하 맥주집을 발견하고는 들어갔다. 맥주집 한쪽 귀퉁이에 있는 작은 무대에서는 긴 머리를 늘어뜨린 통기타 가수가 록음악을 열창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곡 한곡 끝날 때 마다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는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서둘러 나왔다. 12시에 통행금지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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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출퇴근할 때나 학교갈 때 보통 30분에서 1시간 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따로 운동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리 곳곳에서 특히 지하철 근처에는 자전거 보관소가 있었다. 자전거로 만든 청소차도 눈에 띄었고 자전거 수리점도 곳곳에 있었다.

북경에서 자가용은 아직 보편화되지 않았다고 한다. 택시는 소형차가 많았고 조금 낡아 보였는데 운전석과 승객석을 칸막이로 막은 것이 특이했다. 요즘 새로 나오는 택시들은 칸막이가 없다고 했다. 출퇴근 시간에는 도로가 무척 복잡했다. 맞은편에 차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하지를 않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어도 차가 속도를 줄이거나 멈추지 않는 점 등 혼잡스러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며 화를 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북경을 보고나서 중국을 보았다 말하지 말라! 그렇다, 나는 중국을 본 것이 아니라 북경을 본 것이다. 그것도 잠시 잠깐.. 내가 본 북경은 변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70년 대와 2000년 대가 공존하는 곳 북경, 그 미래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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